그녀는 이 말을 듣고 나서 매일같이 집집마다 찾아다녔지만, 5, 6대 조상이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집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실망한 채 부처에게 돌아왔습니다. 석가모니불이 그녀에게 물었지요. “5, 6대 조상이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집이 있던가요?” 그녀는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그런 집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석가모니불이 말했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인생이란 본래 덧없는 것입니다. 태어난 이는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든 조만간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 이 덧없는 육체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부처가 이 이치를 일깨워 주자 아이 엄마는 즉시 깨달았습니다. 그러고선 부처에게 귀의해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행했습니다.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못생기고 무서운 야차가 있었는데, 이 야차에게는 훨씬 더 무서운 습관이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 잡아 먹는 것을 좋아했던 거지요. 마치 호랑이가 사람 먹는 것을 좋아하고 보통 사람들이 소, 돼지, 닭 등을 즐겨 먹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 야차는 특히 어린아이 먹는 걸 좋아해서 아이만 봤다 하면 잡아먹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 있는 아이들은 거의 모두 그녀에게 잡아먹히게 될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마을의 부모들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야차에게도 아이가 있었는데, 그녀는 자기 자식을 끔찍이도 사랑했습니다. 호랑이가 다른 모든 동물이나 사람은 잡아먹어도 자기 새끼는 잡아먹지 않고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죠. 석가모니불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 줬습니다. “돌아가서 그 야차가 집을 나갈 때를 기다렸다가 그녀 아이를 숨기세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주겠어요.” 그래서 마을의 부모들은 야차가 집을 나간 틈을 타서 그녀의 아이를 숨겼습니다. 집에 돌아온 야차는 아이가 안 보이자 깊은 슬픔과 괴로움에 빠져 땅을 뒹굴며 울부짖었고 그러다 결국에는 부처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요. 보세요. 악마조차 부처를 존경합니다. 진정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악귀조차 그들을 존경합니다. 석가모니불이 야차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네 아이를 매우 사랑하느냐?” 그러자 야차가 “그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부처가 또 물었습니다. “네게는 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겠지?” 이에 야차는 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에 부처는 말했습니다. “네가 네 자식을 그토록 사랑한다면 다른 부모들도 그들의 자식을 사랑할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째서 그들의 아이를 잡아먹었느냐? 네가 앞으로 다른 사람의 아이를 먹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네 아이를 찾도록 도와주겠다.” 야차는 바로 약속했습니다. 악마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석가모니불이 이런 이치를 설명해 주자 그녀는 즉시 깨달아 그 후로는 감히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잡아먹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이들은 아주 작습니다. 또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어른과는 매우 다르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들도 똑같이 중생이며, 자라면 우리처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한 발 나아가 동물도 역시 중생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동물도 장차 수행을 많이 하면 그들도 인간으로 태어나고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부처의 길을 공부하고 자비심을 기르고 싶다면 동물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이야기에서 우리는 지혜나 깨달음이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가 설명을 해줘야 이해하게 됩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 나온 아이 엄마를 예로 들어 봅시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죽었지만 다른 사람의 아이들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하거늘 그녀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석가모니불이 지혜로운 말로 그녀를 위로하려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왜 울지요? 당신은 인생이 덧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조만간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인과응보니까요. 당신 아이의 인과가 좋지 못하다면 빨리 죽는 게 당연합니다. 복이 없으니까요. 그러니 그렇게 슬피 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랬다면 그 여인은 이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처하면 우리 대부분이 이런 식의 위로밖에 할 줄 모릅니다. 석가모니불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 엄마에게 죽은 식구가 없는 집을 찾아오라고 시켰지요. 물론 그녀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쯤 되자 석가모니불이 어떤 가르침을 말해도 그녀가 바로 이해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나도 영적 체험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혼자서 ‘도’를 깨달을 수 없다면, 이미 도를 얻은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알려 줄 수 있습니다. 그런 뒤 우리가 직접 체험을 한다면 스스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미타경』에서 석가모니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미타불은 무량광이다. 그는 항상 빛을 발해 우리를 구하고 있다. 아미타불의 세계에는 이런저런 경지가 있다. 노래하는 새들이 있고 아름답고 놀라운 음악 등이 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우리 마음이 고요해지고, 집중된 마음으로 부처와 성인의 이름을 외고 가르침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부처가 이렇게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또 서방 정토에 가서 이런 놀라운 경지를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믿지도 못할 것이고 서방 정토가 어떻다는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읽거나 경전에 관해 설하는 것을 듣는 것은 다른 사람의 내적 체험과 등급에 대한 얘기를 듣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거지요. 깨닫고자 하고 이해하고자 하고 진정으로 이런 경지를 체득하고자 하는 사람은 똑같은 내적 체험을 갖거나 적어도 서방 정토를 살짝 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석가모니불이 그 당시 그 자리에서 야차를 불러 “그런 나쁜 짓을 그만둬라. 다른 사람의 아이를 먹지 말라. 너는 그 부모들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단 말이냐? 네가 하는 일은 옳지 않다. 너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했다고 합시다. 만약 석가모니불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했다면 그 야차는 부처의 말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부모들의 심정을 알지도 못하고 직접 경험하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석가모니불이 바로 그녀에게 이치를 말해 주는 대신 사람들에게 그녀의 아이를 데려가라고 해서 야차에게 아이를 잃은 고통을 체험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고 다시 얘기하자 그녀는 부처의 말을 즉시 알아들었지요. 우리 범부에게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의 심정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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